1. 지우기 버튼 없이 주저리주저리 떠들어 보는 나의 일상.

때가 왔다. 졸업을 하러 셰필드로 되돌아가야 할 날이 오고야 말았다. 작년 5월 말 역병을 피해 한국으로 귀국하고 나서 제법 시간이 꽤 흘렀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두고 가는 사람과 동물이 눈에 너무나도 밟히지만, 어쩌겠는가 싫어서 선택한 일도 아니고 너무나 원하고 스스로가 좋아해서 선택한 일로 인해 돌아가야 하는 것인데. 그래서 더더욱 쇳덩어리 하나가 가슴에 계속 놓여있는 무게감을 느꼈다. 좋아하는 것들 사이에서 선택을 강제적으로 내려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왜냐하면 반복적으로 사적인 실패를 연속했기에, 내 선택으로 인해서 남겨지는 부분들은 비교적 아쉬움이 없는 것으로 치부되어왔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전혀 다른 일이기에 그 사이에서 저울질하는 것으로 비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 모습으로 보이는 것이 싫어 꽤나 노력했다고 자부한다. 나의 입장이 어찌 됐건 이해해주는 모습엔 항상 감사한 마음을 품고 있다. 검은 머리 짐승치곤 꽤나 보답할 줄 알지 않나 자평해본다.

단순히 역병 때문에 사람이 적은 것인데 괜히 아쉽고 쓸쓸한 마음을 대변해주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했다. 항상 누군가와 만나고 헤어지는 장소, 공항이라는 공간은 항시 설렘과 아쉬움이라는 감정이 머무는 듯하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좋다. 상반된 감정을 지니고 있는 공간이 몇 곳이나 되겠는가.

마지막엔 손짓하는 부모님을 뒤로하고 출국심사를 위해 게이트를 씩씩하게 나서는데 옆사람들은 부둥켜안고 우는 모습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순간 내가 너무 매정한가? 생각이 들어 한 번 정도 뒤를 봐주면서 손짓 한 번 던지고 빨리 짐 검사하러 갔다. 뭐 한 두 번도 아니고 제법 자주 있는 일이니까. 심지어 12살에 혼자 텍사스 갈 때도 모친을 등에 지고 뒤도 안 돌아보고 게이트로 들어가서 가벼운 욕 몇 개 먹었던 기억이 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아마 똑같지 않을까 싶은데, 인사 짧게 치고 바로 게이트로 들어가는 편이다.

이런 종류의 인간인 내가 이번 출국길에 발걸음이 무거웠던 것이 소중한 것에 대해서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대변해줄 것이라 믿는다. 물론, 말을 하고 표현을 해야 알겠지만.

빌어먹을 쇠필드로 가기 위해 빌어먹을 스키~히폴에 착륙했다. 비행시간은 매우 빨리 지나갔다. 심지어 비행기가 1시간 일찍 도착해서 더 짧게 느껴졌다. 대강 비행기에서 책 읽고, 주는 밥 냠냠 먹고, 잠 좀 쿨쿨 자고, 좌석에 탑재된 디스플레이 좀 만지작만지작 거리다가, 구비해야 하는 서류들 더블 체킹 해주고 하니 금방 도착했다. 이번에 처음 이용하게 된 KLM,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항공사였다. 예약할 때부터 마찰음이 들리고 네덜란드에서 경유할 때도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던 비행경험을 제공한 개엘렘 꺼져라. 맨체스터 한 번 가는 게 왜 이리도 어려운지. 진짜 각성해야 한다. BA 보다 더 한 애들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역시 어디서나 좋은 의미로든 그렇지 않든, 위에는 그 위가 존재하는 법이다.

그래도 기내 식사만큼은 매우 만족했다. 도쿄에서 인천행 비즈니스 탔을 적 식단 다음으로 훌륭했다. 탑승전엔 마스크를 벗고 과연 기내식 따위 먹어줘야 할까 이런 고민했는데, 식판 받자마자 바로 굴복.

맨체스터 공항에서 짐 찾고 공항과 연결된 맨체스터 공항역으로 직행. 그 와중에 트롤리는 1-2파운드 정도를 지불해야 쓸 수 있었는데, 저렇게 반도 정서와 맞지 않는 곳엔 돈을 쓰지 않는다. 괜한 오기랄까. 근데 어쩌면 멍청한.... 어쨌든 공항역에서 기차 무사히 타고, 가지런히 짐들을 파킹해 놓고 편하게 맨체스터 피카딜리역으로 갈 수 있었다. 해당 역에서 환승해서 셰필드 역으로 가는 경로이다. 아 정말 고된 여정이었다. 개엘렘 타기 전부터 정신적으로 피곤했는데 거기서 끝나지 않고, 육체적 피로로 이전되는 여정이었다. 사실, 맨체스터에서 그냥 우버 탈까 했는데... 경로 찍어보니 11만 원 조금 넘게 나와서 미련 없이 포기했다. 예상과는 달리 막상 맨체스터 도착하니까 기차 탈 수 있는 체력 상태여서 그냥 예약해둔 기차를 이용했다. 셰필드에 공항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상상을 거듭해가면서... 더듬더듬 환승해가며 셰필드에 무사히 도착했다.

역에 도착해보니 친구가 마중 나와주었다. 보자마자 인사를 나누고 바로 준비한 선물을 쥐어줬다. 마음에 들어 하는 모습을 보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친구가 대신 우버를 불러주고 나를 우버에 태웠다. 비용도 친구가 지불했다. 참 의리가 깊은 친구가 아닐 수 없다. 적당히 선 지키고 거리 지키면서 성숙한 우정을 나누는 사이이다. 학교에서 제일 의지하는 친구이다. 내 눈은 정확해. 근데... 기숙사 정문이 아닌 후문을 목적지로 찍어줘서... 그 많은 짐을 끌고 언덕을 내려가고 언덕을 다시 올라가야 했다. 고맙다... 친구야....... 잊지 못해. 작년에 피난 갈 때, 키를 반납하고 갔기 때문에 다시 키를 받으러 정문 리셉션으로 가야 했던 상황을 사전에 충분히 설명 못한 나의 탓이다.

택시 창문 사이로 보이는 풍경들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고, 동시에 낯설으면서도 익숙했던 풍경이었기에 내심 반가웠다. 언제든 돌아와도 마음 편한 도시이다.

자가격리 동안 테스트 킷을 우체통에 넣어야 했기에 격리기간 동안 두 번 나가볼 수 있었다. 기숙사에서 학교를 가로질러 웨스트 스트릿으로 가면 우체통이 있다. 제일 가까운 우체통은 웨스트 스트릿에. 아주 조금씩 바뀐 것 같긴 한데, 거의 바뀌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참 좋은 도시이다. 무엇보다 공부하기 최적의 도시가 아닐까 한다. 응 아니다. 네니요. 그래도 만족한다.

자가격리를 마치고 바로 학교 학생회관으로 달려가서 새로운 학기와 함께 할 스케줄러를 샀다. 춘장 색의 학교 로고가 박힌 얇고 가벼운 스케줄러. 학교 스케줄에 맞게 구성되어 있어서 애용한다. 마침 오랜만에 학교에 방문한 날은 학교의 오픈데이. 신입생이 될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3학년이지만 예비 1학년들 틈에 끼여 발걸음에 자신감을 얹어주었다. 우리 학교로 옮겼던 족적들을 환영합니다.

안녕! AT! 대학에서의 거의 모든 기억이 담겨있는 빌딩을 다시 보니 매우 반가웠다. 앞으로 알차게 지낼 시간들을 상상하니 설레기도 했고. 개강 전에 AT와 연결된 웨스턴 라이브러리에도 조만간 찾아가지 않을까 한다.

다시 돌아오니 좋다.
Forged in Sheffield, Steel 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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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famapoaf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