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코네에 사는 펭귄

2020. 7. 10. 07:29 from pj ja

 

많은 성원을 보내주는 누군가를 위해 기억의 파편들을 모아 읊조리는 펭귄에 관한 글

 

 

섣불리 가벼운 마음으로 마실을 나갈 수 없는 규모의 호수 

 

2015년 1월과 2월, 그 해 겨울에 쥬니와 택과 함께 2박 3일 일정으로 처음 갔었던 하코네. 도쿄에서 2시간 30분 정도 걸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도쿄를 기준으로 요코하마보다 더 먼 곳인 하코네. 멀어진 만큼 어느 것에 더 가까워짐을 뜻한다! 후지산에 두 걸음 정도 가까워진 상태였기에 난생처음 열도의 지붕인 후지산을 볼 수 있었다. 그것도 굉장히 뜻하지 않게, 굉장히 어이없는 타이밍에. 후지산 가까이에 있었지만, 타이밍이란 것이 당연한 상황마저도 그것에 대해 전혀 다른 느낌을 주더라. 

 

 

호수 바로 옆에 자리 잡은 하코네 프린스 호텔

 

도쿄에서 하코네로 가기까지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시간이 걸렸다. 신주쿠에서 고속버스를 타고서 하코네에 있는 읍내에 내려 호텔에서 운영하는 셔틀로 갈아타 무사히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당시엔 그저 잔잔한 장면들의 연속이었지만, 5년이 훌쩍 지나버린 지금 다시 돌이켜 보니 잔잔함 속에 우직한 힘이 내재되어 있는 뿌리가 깊은 기억들이다. 해가 뜨면 무지막지하게 큰 호수 주변을 산책하고 떴던 해가 지면 온천을 즐겼다. 겨울산에서 쌩쌩 불어오는 칼바람에 어김없이 오들오들 떨며 물이 튀지 않게 노천탕에 쏙 들어가 목만 쏙 빼놓곤 했다. 목 밑으로는 따뜻하고 얼굴은 겨울바람 덕에 상쾌해지고 정신이 맑아진다. 아늑한 상쾌함을 차분히 즐기고 있는 와중에 갑자기 함박눈이 살포시 내 머리와 탕에 떨어지는 그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밝은 호수를 볼 수 있었던 2308호

 

아침에 마주하는 풍경은 위 보기와 같다. 청명한 하늘에서 곧장 내려오는 날카로운 햇빛은 잔잔한 물결에 부딪혀 간지러운 눈부심으로 하코네의 아침이 왔음을 알린다. 

 

 

T자형 차선 위에 가지런히 주차되어 있는 자동차들

 

호텔 로비를 통해 밖을 나가면 나도 모르게 흐뭇하게 미소 지어지는 질감들이 자리하고 있다. 주차장 반대편 호수를 따라 쭉 걷다 보면 펠리컨도 볼 수 있다. 내 기억엔 울타리가 있었으나 위는 뚫려있었던 새장이었다. 하지만 펠리컨은 날아가지 않았던 기억이 선명하다. 대체 뭘까.

 

 

주위를 감싸고 있는 배경에 온전히 초점을 맞추면

 

당시 속해있던 계절이 겨울이었기에 산을 덮고 있는 흰색의 무언가가 당연히 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이 아니었다. 조금만 더 생각을 해보니 눈이 듬성듬성 덮여있었고, 이에 대해 수상함을 감지한 나는 곧바로 검색을 해보았다. 내 초기의 예상과는 달리 눈이 아니었고 화산재였다. 그렇다.. 우리가 보고 있는 저 산은 활화산이었다. 활화산인데도 불구하고 곤돌라를 설치해서 왕래할 수 있게끔 해놓았고 심지어 저 위에는 하코네 신사가 위치해 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가 떠나고 나서 1-2년 후인 것으로 기억하는데, 하코네 화산이 분화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아무튼 당시에 누나는 저기에 올라가 보자고 했지만 택과 나는 강도 높은 산책으로 인해 그저 빨리 온천에 몸을 녹이고 싶었기에 누나의 제안에 호응하지 않았고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호텔로 복귀했다. 로비에서 생각했다. 산 위에서 바람을 맞으면 얼굴에 멍자국이 나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 후에 생각해보니 누나 말을 들을걸 그랬다. 내가 언제 또 하코네에 와보겠으며 저 산을 올라가 보겠나 하는 가벼운 후회 정도. 이것이 계기였을까. 나는 누나 말을 아주 잘 듣는다.. 내가 왜 이러지...? 싶을 만큼 아주 잘 듣는다.

 

호텔에서 몸을 녹이고 차가운 주먹으로 얼얼해진 몸이 정상화가 되었을 때쯤 어김없이 배가 고파버린 우리는 호텔 셔틀을 타고 읍내로 나가 먹을 것을 사러 갔다. 셔틀은 20분 후에 다시 호텔로 회차하기 때문에 우리는 20분 안에 허기를 달랠 수 있는 영양소들을 재빠르게 사 가지고 나왔어야 했다. 그야말로 아수라장. 그때를 다시 떠올려 보자면, 처음엔 여유롭게 식료품점을 둘러보다가 어느 빵집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써서 정신없이 계산을 마무리하고 셋이 셔틀이 있는 곳까지 뛰었다. 자연스럽게 택이 먼저 가서 셔틀을 잡아두고 나는 누나 뒤에 따라가며 누나가 뒤처지지 않게 무언의 채찍질을 했다. 마치... 1차선에서 느긋하게 달리고 있는 운전자의 뒤에 바짝 붙어 앞차를 압박하는 것 마냥. 다행히 우리는 정시에 밴에 탑승했고 무사히 호텔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때 허겁지겁 먹었던 메론빵 잊지 못해..

 

허기가 가신 우린 바로 온천으로 퐁당. 온천의 노천탕들은 길쭉한 대나무를 엮어 남/여가 들어가는 탕을 구분 지은 형태였는데, 매번 각자가 언제 나올지 말은 하지 않고 이따 봐~ 하고 서로 흩어진 우리는 옆탕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물소리로 알았어야 했다. 물 가르는 소리가 들리면 아직 누가 있구나. 하지만 그 누군가가 누나인지는 장담할 수 없는 그런 상황에서 그다지 개의치 않고, 이쯤 되면 슬슬 나가야겠다 싶어서 나가면 온천으로 들어가는 로비에서 누나와 딱 마주쳤다. 그때 당시엔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신기하네 거 참.

 

도시와 멀찍이 떨어진 하코네에서 2박 3일 정도 있어보니 들었던 생각이 있다. "아, 나는 도시에서 살아야겠다" 나 말고 나머지 둘은 그다지 지루해하지 않았는데, 나는 하루가 지나니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좋았다. 좋았는데 그냥 좀 지루했다~ 이 정도인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지 않는 노 자비 원칙으로 이루어져 있다. 왜냐하면 SSoA는 영국의 셰필드라는 곳에 있기에.. 영국 사람들은 셰필드가 시골이 아니라 도시라고 생각하지만, SMA에서 줄곧 살아온 내 입장에선 이유여하 불문 시골이다. 뭐 나쁘다는 건 아니고, 그냥 때로는 지루할 때가 아주 가끔 있다는 것 빼곤 공부하기 최적화된 도시이다. 헐 나 방금 셰필드를 도시라고 했네. 아무튼 대전이 이런 느낌일까. 셰필드는 7개의 언덕 위에 지어진 철강도시였고 지금은 대학도시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셰필드로 오게 된 것에 아주 감사하다. 런던에서 공부했다면 지금보다 감당해야 할 것들이 많고 그 농도가 짙어져서 공부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할 것이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듯, 모든 것은 균형이다.

 

 

도쿄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처음 마주한 후지산의 모습

 

위 사진은 나의 2학년 수강신청과 연관되어 있다. 여행 일정과 수강신청이 겹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남에게 수강신청을 부탁했다. 전화로 열나게 설명을 했지만, 남의 둔탁한 손가락들을 믿은 내가 잘못이었을까. 보기 좋게 실패. 라고 생각했으나 지금 생각해 보면 좋은 선택이었다. 1학년의 과정을 마치고 2학년으로 올라가기 전, 배 교수님은 나에게 행 교수님의 스튜디오를 추천하셨다. 나도 행 교수님이 남기신 인상적인 궤적들에 눈이 갔던 터라 배 교수님 말대로 행 교수님의 스튜디오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남의 근본 없는 컨트롤로 인해 나의 계획이 산산조각 났다. 이후에 차선책으로 들어갔던 곳이 임 교수님의 스튜디오였고, 한 학기 내내 언쟁을 벌이게 되는데... 굉장히 값진 경험이었다. 아무튼 저 후지산을 보면 마음대로 되지 않았던 수강신청 생각이 나고, 이처럼 내 마음처럼 되지 않아도 언제나 새로운 기회가 열려있으며 그것이 오히려 다행으로 여겨질 때가 있기 마련이다. 어쨌든 하코네에서 도쿄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남에게 걸려온 사죄의 전화를 받고 쌍욕을 시전 할 찰나에 보였던 장면이 저 후지산이다.

 

 

하코네 펭귄

 

당시 호텔 로비에서 가져온 간략한 평면도를 아직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평면도를 보면 당시의 상황에 대해 꽤나 많은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나는 호텔 3층에 있는 2308호에 묵었고, East Wing이라 명명된 곳에서 친구들과 식사를 하였다. 그 식사는 값에 비해 맛있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가 읍내로 나가서 그 오합지졸을 만들어낸 것이다. 

 

하코네 프린스 호텔의 평면상에서 가장 눈에 띌만한 점은 East/West Wing이라고 이름 지어진 호텔의 양쪽 날개일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나로 하여금 호텔이 펭귄처럼 보이게 한다. 호텔의 두 날개는 호수를 향해 적극적으로 활짝 펼쳐진 것도 아니어서 자칫 애매한 태도로 보이기 십상이다. 둥그런 모양이 호수의 장면들을 잘 담을 수 있는 형태일까 하는 의구심마저도 든다. 하지만 호수를 넘어 하코네가 가진 특성을 보면, 하코네의 주인공은 호수뿐만 아니라 그 주변을 이루는 나무와 활화산이 될 것이다. 호수-숲-활화산으로 이어지는 연속성을 둥그런 날개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역할을 하지 않나 싶다. 아, 여기서 이어준다는 것은 친절하게 마디마디를 세심하게 이어준다기보단 자연스럽게 순환시킨다는 뜻이 더 강하다. 결과적으로 그 날개들은 하코네가 가진 풍경들을 자연스럽게 순환시키는 공간감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한다. 각 날개들 뒤로 전개된 직선의 방들의 방향성은 곧바로 활화산으로 향하게 하고, 그 장면은 숲과 섞인 장면이었다가 주차장까지 가면 여과 없이 주위 풍경을 보여주는 서사를 가지고 있다. 반대로 둥그런 날개에서는 곡선의 시선으로 호수를 파노라마식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하코네 프린스 호텔의 위와 같은 감상은 펭귄과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펭귄의 날개는 인상적이긴 하나 자칫 겉으로만 보면 그다지 쓸모없어 보인다. 펭귄은 날개가 있지만 하늘을 날지 못한다. 그래서 쓸모없다고 표현할 수 있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펭귄의 날개는 창공을 위한 것이 아닌 하늘보다 깊고 드넓은 바다를 위해 준비된 근사한 날개라는 것이다. 여타 조류들은 오로지 하늘을 날기 위한 쓰임새로써 날개를 사용하곤 하지만 그 깊이와 넓이를 함부로 가늠할 수 없는 바다에선 결코 그들이 가진 날개의 장점을 뽐낼 수가 없다. 그들이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펭귄은 바다에서 날아버리는 멋을 보여준다. 때론 그 용도가 불분명해 보일 때에도 그 쓰임새가 있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하코네 프린스 호텔의 날개가 나에겐 펭귄의 날개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어떠한 펭귄도 하늘 위를 날 수 있는 날개를 바라지 않는 것처럼 프린스 호텔도 그곳만이 가진 날개가 더욱더 특별한 이유이다. 그리고 여기서 더 놀라운 점은 펭귄이 바다를 헤엄치기 위해 날개를 가진 것 외에도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귀쌰대기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 언제든 거슬리는 것에 워럴귀쌰대기를 날릴 준비가 된 진정한 얼음 위의 전사이다. 졸라리 멋지지 않습니까~? 하코네 프린스 호텔의 귀쌰대기는 과연 어떤 부분일까 하는 학문적 호기심이 언젠가 나를 다시 하코네로 데려다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2017년 긴자 미츠코시 백화점

 

자신의 아버지께서 나카모리 아키나의 팬이라 자신의 딸 이름도 아키나로 지어버린 부친을 둔 친구 아키나가 내게 말해주었다. 매년 하코네에선 마라톤이 열린다고. 그 대회가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것인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갑자기 신기하다. 하코네에서의 기억이 아직까지도 내게 은은하게 영향을 주고 있고, 하코네에 대한 정보들이 넓은 간격으로 업데이트되고 있단 사실이 마냥 귀엽게 신기하달까.

 

 

이른 아침의 시나가와

 

지금 내가 마주한 창밖 풍경이 위 사진과 같다. 그렇다. 나, 야근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기분이 구린 누군가를 위해서이다. 둥그런 날개에 관한 정리되지 않은 누추한 글이 하루에 잠깐 피식하고 웃을 수 있는 몇 분 혹은 몇 초라도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급하게 끄적여 보았다.

 

 

우측 엉덩이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고 있는 펭귄

 

피상적인 관점에서 펭귄의 날개는 다소 의문점이 가득한 부위이지만, 그 목적을 자세히 살펴보면 자비가 결여된 실용적인 무기인 동시에 광활한 소금물 심연에서 비상할 수 있는 엔진과도 같다. 이렇듯, 내가 경험했던 하코네 프린스 호텔은 겉으로 보기에 다소 황당할 만큼의 동선과 배치를 따르고 있지만, 누구나 그곳에 머물게 되면 그곳에 서린 건축적 낭만을 알게 될 것이다.  

 

펭귄 똥 같은 (펭귄 똥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그 형태가 동글동글할 것만 같다, 더러워서 검색은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누구 똥 치우는 게 일상인 삶인지라). 아무튼 펭귄 똥 같은 글을 마무리 지으면서 자연스럽게 주책맞은 생각을 해본다. 다시 그곳을 정벌할 수 있는 날이 또 올까? 가게 된다면 그땐 누구와 함께일까? 혼자일까? 아마 혼자일 것이다. 늘 그렇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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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famapoaf :